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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 타고 방방곡곡] 인천시 중구 개항장거리_근대를 걷다, 완벽한 하루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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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관리자
  • DATE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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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여 따라온 나쁜 마음을 쫓아내고 고운 마음을 중무장해 길을 나선다. 거대한 이유가 있거나 거창한 사명감 따위가 있어서도 아니다. 그냥 너니까 그 옷이 어울리고 그렇게 할 수 있고 그게 너라서 응원을 담아 마음을 다잡을 수밖에 없는 곳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을 열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넓어지고 마음의 문을 닫으면 어둠 속으로 빠져 긍정을 잃게 된다. 나를 개방하고 찾아온 곳은 인천 개항장거리다. 개항장은 1883년 개항 이후 우리나라 근대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2021년 무장애 여행지로 선정돼 열린 관광지로 조성됐다.

17세기 후반 조선은 쇄국정책으로 닫힌 사회였다. 그렇다 보니 세계정세에 능하지 못했고 외세와 불합리한 조약으로 빗장이 강제로 열리고 말았다. 그 고통의 값은 혹독했다. 국민들의 삶은 피폐해지기 시작했고 기어코 일본의 식민지를 겪어야 했으며 동족상잔의 잔혹한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이후 과거를 반성하며 열린 사회로 가기 위해 부단히 개방해 이제는 세계인이 부러워하고 살고 싶은 국가와 도시가 됐다. 고통스러운 치부는 역사가 됐고 숨김없이 드러내며 여행 콘텐츠로 부활했다. 그렇게 인천 개항장거리로 거듭났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대불호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 대불호텔

세월 따라 중화요릿집으로 변하기도 하고

 

개항장거리는 목포, 군산과 함께 근대역사 여행지 중 한 곳이다. 1876년 일본과 불합리한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후 부산과 원산에 이어 세 번째로 개항했다. 이때부터 수많은 외교관과 여행가, 선교사, 상인들이 제물포를 통해 조선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사진과 기록으로 당시의 인천 개항장의 모습을 담아냈고 조선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외국인들이 인천항을 통해 조선에 발을 디뎠다.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한양이었다. 하지만 인천에서 한양까지는 열두 시간 이상 걸리는 먼 거리여서 인천에서 하루를 묵고 갈 호텔도 필요했다.

필요가 있으면 공급이 따르기 마련이다. 1883년 개항장거리에 한국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대불호텔이 들어섰다. 대불호텔은 일본식 2층 목조 가옥으로 지어졌지만 곧이어 3층 서양식 벽돌 건물을 신축하고 침실과 식당을 갖춰 본격적으로 서양인들을 고객으로 맞았다. 그러던 중 경인철도가 개통되면서 인천에서 하루 머물 필요가 없어지고 러일전쟁 이후 서구인들의 출입마저 뜸해지면서 대불호텔은 경영난에 빠져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대불호텔 내부. 호텔이 문을 연 개화기의 모습으로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폐업 수순을 밟던 대불호텔을 중국인이 인수해 일본인과 중국 상인들을 상대로 북경오리 전문점으로 업종을 변경했다. 중화요리 식당은 개점하자마자 인천은 물론 경성까지 알려질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 호황을 누리던 중화요리점도 1960년대 즈음, 청관거리가 차츰 쇠락의 길을 가며 십 년 후 경영난을 이유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중화요릿집의 흔적이 남은 건 ‘중화루’라는 간판뿐이었다. 그 후 내부는 월셋집으로 바뀌었다.

 

1970년대 “그때를 아십니까”

“아저씨 아저씨 우체부 아저씨”

 

대불호텔은 2018년 전시관으로 다시 태어나면서 새롭게 역사를 쓰기 시작했고 열린 관광지로 조성돼 장애인 등 관광 약자도 많이 찾는 무장애 여행지가 됐다. 1층 전시관은 대불호텔의 외관 및 과거 번창과 쇄락 과정을 전시하고, 2층은 인천 중구의 시작과 변천 과정 생활사를 다양한 콘텐츠로 관람할 수 있다. 18세기 대불호텔 객실 내부는 지금 봐도 근사하다. 앤티크 한 가구로 꾸며졌고 고급스러우면서 세련미가 넘친다.


▲대불호텔의 또다른 명물 전시관 ‘그때를 아십니까’ 입구. 어려웠던 1970년대 인천을 소환한다.
대불호텔에 또 다른 볼거리는 1층 뒷문 쪽으로 진입하는 ‘그때를 아십니까’ 전시관이다. 1970년대 인천의 생활상을 소품과 담벼락 그림으로 실감 나게 재현해 놨다. 담장 앞에 그려진 커다란 짐 자전거는 연탄을 싣고 골목을 누비며 배달하던 시절이 소환된다. 석유곤로 위에는 가마솥이 얹혀 있고 마당에서 김장하는 엄니 모습이 그림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물을 퍼올리는 펌프와 빨간 고무통은 그 시대로 데려간다. 부잣집 밥상인 자개상 위에는 쌀밥에 푸짐한 반찬이 군침 돌게 한다. 골목길 전파사에는 고장난 라디오가 과거로 여행 오라고 시그널을 보낸다. 경험은 일인칭이지만 기억은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들과 다인층으로 추억을 공유한다. 그때를 아십니까. 전시관에서처럼.

대불호텔 바로 옆에는 일본 나가사키에 본점을 둔 제18은행 인천지점이었던 건물이 있다. 18은행은 일본의 은행 중 한 곳으로 지금도 일본에 18은행이 곳곳에 있다. 현재는 인천 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지만 휠체어 탄 여행자는 계단으로 막혀 전시관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다만 전시관 옆에 근대건축전시관 모형과 장애인화장실만 이용할 수 있다.

근대건축관 앞에는 국내 최초 우편배달부 조형물도 있다. 우리나라 우편제도는 1884년에 서울과 인천에 우편물이 교환되기 시작하면서 막이 올랐다. 그때의 우체부는 갓을 쓰고 곰방대를 물고 있다. 우산도 들고 편지가 들어있는 가방을 메고 우편물을 배달했다. 우체부 옆에는 1912년식 우체통 조형물도 있다.

우체부 아저씨는 편지만 배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이웃 마을 소식을 전해주는 플랫폼 역할도 했다. 큰언니와 나이 차가 많은 난, 시집간 언니 소식을 전해주는 우체부 아저씨 기다리며 우체부 아저씨 노래를 매일매일 불렀다. 지금도 시골 우체부 아저씨는 편지도 전해주지만 물건도 사다 주고 홀로 사는 독거노인 안부도 확인하는 홍반장이기도 하다.

 


▲ 근대적 우편제도가 시작된 시기, 우체부 아저씨는 갓 쓰고 곰방대 물고 편지 배달을 했다. 국내 최초 우체부을 재현한 동상.
 

“아저씨 아저씨 우체부 아저씨

큰 가방 매고서 어디 가세요

큰 가방 속에는 편지 편지 들었죠

동그란 모자가 아주 멋져요

편지요 편지요 옳지 옳지 왔구나

시집간 언니가 내일 온데요.”

 

신포시장의 닭강정과 차이나타운의 자장면

휠체어 이용인에게 완벽한 하루가 된 여행

 

개항장거리를 중심으로 좌우상하로 여행지가 몰려 있다. 개항장 문화거리에서 500여 미터 정도 가면 신포시장이다. 신포시장은 닭강정으로 유명하다. 위쪽으로는 맥아더 장군 동상이 있는 자유공원이다. 맥아더 장군은 한국전쟁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진두지휘하며 전세를 역전시킨 영웅이다. 그래서인지 맥아더 장군을 신으로 모시는 무속인도 있다고 한다. 자유공원은 휠체어 타고 올라가도 무리 없다. 공원에서 내려다보이는 인천 앞바다는 감정 체증이 뻥 뚫린다.

자유공원에서 차이나타운으로 내려왔다. 차이나타운과 천사 벽화 골목은 붙어 있다. 차이나타운에는 문턱 없는 식당이 많아 골라 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차이나타운에 왔으니 자장면을 안 먹을 수 없다. 한때 짜장면과 자장면의 명칭을 두고 논쟁도 있었다. 결국 두 명칭을 다 사용해도 무방하다는 결론이 나면서 언어는 시대와 세대별로 살아 움직이는 생물 같다.


▲열린 관광지로 조성된 개항장거리에는 촉각을 통해 건축물을 만날 수 있는 촉각 안내 모형도 설치돼 있다. 개항박물관 촉각 안내 모형.
살면서 가끔은 내가 원하는 완벽한 날이 오거나 만들고 싶을 때가 있다. 시험을 잘 봤거나 내가 원하는 사람에게 인정받거나 인생에는 반짝이는 별 같은 하루가 있다. 내게 완벽한 날은 장콜(장애인콜택시)이 바로 연결될 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않고 바로 탈 때, 화장실이 충분하고 넓어 휠체어 타고 들어가도 걸림이 없을 때, 원하는 음식점에 경사로가 있고 자동문일 때, 손님으로 대접받으며 충분한 서비스를 받을 때다. 그런 날을 인천 개항장거리에서 만났다. 원하는 여행지가 모여 있고 접근 가능한 곳들이 천지인 개항장거리. 그렇게 내가 원하는 완벽한 하루가 됐다.

출처 : 미디어생활(https://www.imedialif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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